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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 3장 - 도시는 누구의 것인가? 본문

세미나 발제문/1415 반란의 도시-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3장 - 도시는 누구의 것인가?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11. 4. 04:09

반란의 도시 3장 - 도시는 누구의 것인가?
2014년 11월 1일
발제자 : 이주은

 최근 한국에서는 검찰이 전국의 고속도로에 운행되고 있는 자동차를 6000여 개의 CCTV를 이용하여 자동식별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시범운행까지 하였다고 한다. [1] 게다가 카카오톡 사찰이 논란이 되어 그나마 보안 체계가 믿을만 하다는 텔레그램으로 갈아탄 것이 불과 몇주 전이었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가 나의 사생활을 마음껏 들춰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불쾌해진다. 산골짜기에서 자급자족하지 않는 이상, 시민들은 공동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공간을 통해 역으로 감시를 당하거나 그마저도 빼앗기는 상황이 되었다. 도대체 왜 이런 상황이 되어버린 걸까? 도시는 도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최근 들어 몰아치고 있는 민영화, 공유재의 사유화, 공간통제, 치안 유지 및 감시의 물결은 일반적으로 도시 삶의 질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에 도시의 공동성이 상실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논의가 다시 울려퍼지고 있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대도시는 공동적인 것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동적인 것을 반자본주의적 비판과 정치적 행동주의의 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p128)

공유지의 비극

 미국의 생태학자 개런 하딘의 <공유지의 비극>은 목초지에 소가 공유되는 예를 통해 ‘지하자원, 초원, 공기 같이 공동체의 모두가 사용해야 할 자원은 사적 이익을 주장하는 시장의 기능에 맡겨 두면 이를 남용하여 자원이 고갈될 위험이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공유지의 비극>은 개인의 사유재산권이 주어지면 토지와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뒷받침 하거나 민영화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인용은 하딘의 논문을 잘못 읽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만약 목초지가 아닌 소가 공유된다고 해보자. 하딘의 비유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는 자원의 공유적 성격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소를 사적으로 소유하면서 개인적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중략…) 공유재에 관한 사고가 중세 말부터 오늘날까지 영국의 토지 인클로저2사례에서 도출된 몇몇 협소한 가정의 틀 속에 갇혀 있다. 사실 오늘날 공유재에 관한 사고는 사적 재산권을 강화하자는 해결책과 국가의 권위주의적 개입을 강화하자는 해결책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락가락하기만 한다.’ (p129)

여성 경제학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공유의 비극을 넘어>에서 공유재를 둘러싼 몇가지 가정을 해체하려 했다. 한가지 예로 개런 하딘의 <공유지의 비극>에서 소의 주인들이 서로 소통하였다면 공유 목초지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오스트롬의 사례는 100여 명가량의 이용자만만이 연구대상이 되었다. 지구 온난화와 같은 큰틀 안에서도 문제는 해결될까? 저자는 범위가 큰 문제일 경우 개별 이용자 간 직접 협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중층적’ 의사결정 구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위계적’ 조직형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존 열대우림 지대를 예로 들어보자. 열대우림의 생물다양성과 원주민 고유문화를 우리 지구의 자연문화 공유재로 정해놓고 보호하려면 인클로저를 강제하는 엄격한 법이 필요하다. (…중략…)인클로저를 통해 공유재를 보호한다는 발상은 입에 올리기 쉽지 않은 것이기는 하나 반자본주의 전략을 세우면서 적극적으로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p133)

전통적 사고에서도 그렇고 특히 좌파에게 ‘위계’라는 말은 인기가 없는 듯 하다. 하지만 저자는 ‘위계’조직이나 ‘수직’조직을 기피하는 것은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말한다. 수평성을 지배적 조직 원리로 정할 때의 한계를 인식하고, 필요하다면 이를 초월할 준비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유재를 둘러싼 투쟁

도시에 새로운 공원이 조성되면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공시설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쾌적하고 건강한 도시로 발전하는 것일까? 사실 그렇지 않다. 새로운 유형의 도시 공유재는 시도조차 돈벌이로 이용되고 심지어 계획단계부터 그것을 염두해 두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공원이 조성되면 주변 땅값이 상승되어 원주민들은 쫓겨나는 처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공원같은 공공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부유층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을 위해 공유재할 잠재적 가능성을 높이기보다는 낮추는 기능을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공유재를 어떻게 접근해야하며 투쟁해야 할까?   

‘도시가 치열한 계급분쟁과 계급투쟁의 장이 되면서 도시행정 당국은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계급에게 공공재(양질의 공공주택, 의료, 교육, 도로, 하수도시설, 상수도시설 등)를 공급하기도 했다. 이런 공공 공간과 공공재는 공유재의 본래 기능을 발휘하게 하려면 시민과 민중의 정치활동이 필요하다. 사회의 여러 세력이 상호이익을 위해 공교육을 영유하고 보호하고 강화할 때 공교육은 하나의 공유재로 자리잡는 법이다. 아테네의 신티그마 광장,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 바르셀로나의 카탈류냐 광장 등은 공공 공간이지만, 사람들이 거기 모여서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고 요구의 목소리를 높임에 따라 일정한 도시 공유재가 되었다.’ (p137)

도시 공유재의 비극

‘공유재 자체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고 변질되는 일도 벌어진다. 미국 볼티모어 남부에서는 도시 중산계급화를 통한 지역사회 재활성화를 추진하는 정책 탓에 활력과 생기가 넘치던 거리생활은 사라지고 말았다. 예전에 주민은 무더운 여름밤이면 현관 앞 계단에 앉아 더위를 피하며 이웃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집집마다 이중, 삼중 방범 장치가 설치된 가운데 에어컨이 돌아간다. (…중략…) 재활성화 정책으로 근근이 남아있던 활력마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 지역 주민의 여론이다. 확실히 이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도시 공유재에서 벌어지는 진정한 비극을 훨씬 잘 설명해준다. 지역사회에서 활기차고 재미있는 일상 생활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부동산 개발업자, 금융업자, 상류층 소비자의 약탈 행위에 직면해 일상생활을 잃어버리고 도시 고유의 사회적 상상력을 빼앗기고 만다.’ (p145)

위의 미국 볼티모어의 예는 사실 한국에서도 이중, 삼중으로 반복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느껴진다. 나는 어렸을 적 살던 동네에 아주머니들이 모여 반상회를 하던 정자를 기억한다. 그 옆에 작은 풀 숲이 있어서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곤 했다. 그 풍경이 그리워 10년 후쯤 다시 찾아가보니 그 부지 전체가 거대한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이런 박탈감은 이제 도시인들에게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 이대로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 저자는 한가지 가정을 해볼것을 제안한다. „오늘날 도시에 투입된 집단적 노동이 생산해낸 방대한 공유재가 곧 대도시라고 하면 어떨까“라고 말이다.

‘이 사실은 당연히 도시를 만들어낸 집단적 노동자가 도시권을 요구할 근거가 된다. 이제 도시권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은 자본을 겨냥한다. 자본은 타자가 생산한 공동 생활을 무자비하게 먹어치우며 거기서 지대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 ...중략... ) 다양한 규모로 공유재를 생산하거나 획득하는 사람과 사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공유재를 영유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문제인 것이다. 도시 정치에 수반되는 부패의 상당 부분은 공공투자의 분배 방법과 관련이 깊다.‘ (p146)

도시 공유재를 되찾자

 2007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전세계 공황이 일어나자 전 세계에 걸쳐 혹독한 긴축정책이 실행되었다. 자본은 이 위기를 기회로 이용하여 더욱 극성스럽게 약탈 활동에 나섰다. 경제성장을 회복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라고 하면서 공유재를 사적으로 영유하는 데 힘쓰는 것이다. 현재 한국도 정부가 교육이나 의료 그리고 대중교통까지도 민영화 하려는 정책을 밀어 붙이고 있다. 

‘국가가 공급하는 공공재가 감소하거나 (교육 분야에서 그러하듯) 일개 사적 축적 수단으로 변질된다면, 더 나아가 국가가 공공재 공급에서 손을 땐다면, 가능한 대응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주민들이 스스로 뭉쳐 자신의 공유재를 공급하는 것이다. (제5장의 볼리비아 사례를 보라). 공유재는 사회적 이익을 위해 생산되고 보호되고 이용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인식은 자본가 권력에 저항하고 반자본주의 이행의 정치를 다시 생각하는 데 필요한 기본 뼈대이다.’ (p158)

‘지금까지 이야기한 과제를 이뤄내려면 이중의 정치 공세가 필요하다. 먼저 국가를 향해서는 공공 목적에 부합하게 공공재를 공급하라는 공세를 펼쳐야 한다. 더불어 주민이 스스로 조직화에 힘써 비상품적 재생산 공유재와 환경 공유재의 질을 확대하고 높이는 방향으로 공공재를 영유하고 이용하고 보완해야 한다. 뭄바이, 상파울루, 요하네스버그, 로스앤젤레스, 상하이, 도쿄 같은 대도시에서 민주주의적 사회운동은 공공재와 도시 공유재를 생산하고 보호하고 이용하기 위해  싸워나가는 것을 중심 과제로 삼아야 한다. 이때 오늘날 널리 유행하는 급진파 이론 속에 담긴 상상력과 지식을 뛰어넘는 게 절실하다. 자본주의적 형태의 도시 공간 형성을 통해 공공재와 도시 공유재가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영유되기 때문이다.’ (p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