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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발제문/12

필리핀의 봄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5. 30. 05:22

필리핀의 봄

 

발제자 유재현

 

2006년의 봄 필리핀은 더웠다. 필리핀 마닐라 공항은 후덥지근했고 주변의 차 소음과 디젤 냄새가 눈과 코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 기억은 아직도 그곳에 대한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바나나 농장을 방문하기 전 몇가지 준비가 필요하여 마닐라를 머물면서 지역 문화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분과 함께 시내의 약간 외곽지 대규모 재래식 시장에 가자 공용어이지만 영어로 대화가 되지 않았고 지역언어인 타갈로그로어로만 소통이 가능했다.

참고로 필리핀은 미국,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영어를 쓰는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물론 아래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필리핀의 고유 언어도 있다. 대표적인것이 공통어로 되어 있는 타갈로그어이다. 이것은 원래 루손 섬의 마닐라 주변에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텔레비젼과 라디오를 비롯한 매스컴의 발달로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 각 지방에는 이와 별도로 세부아노, 일롱고, 와라이와라이 등 각각 독자적인 언어가 있다.

 

최종 목적지였던 섬나라 필리핀의 또다른 섬 최남단 민다나오지역의 다바오의 작은 공항에 도착하자 지역 바나나 농장을 중심으로한 노동자를 위한 권리보호을 위해 일하는 NGO의 인상좋은 로저씨가 마중을 나왔다.

NGO의 도움으로 진행된 바나나 농장 이야기로 가기전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민주주의 제도가 시작된 나라 필리핀을 알아보자.

 

필리핀에서 근대적 의미의 선거제도가 시작된 것은 1907년으로 필리핀 은 적어도 선거민주주의에 관한 한 100년에 이르는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Anderson 1996; Tancangco 1988; Teehankee 2002).

필리핀의 경우는 1986년 피플파워 혁명과 제도적 민주주의의 복원으로 민주주의의 이행에는 성공했으나, 그 이후 오늘날까지 정치적 독점이 지속 되고 있는 사례에 속한다.

 

면적은 30만 76㎢, 인구는 97,976,603 (2009년 7월 기준. 정식명칭은 필리핀 공화국(Republika ng Pilipinas)이다. 수도는 필린핀이고 공용어로 영어와 타갈로그어를 사용하고 있다. 필리핀해(海), 셀레베스해, 남중국해의 경계를 이루며 타이완[臺灣]섬과 보르네오섬, 셀레베스섬 사이에 있다. 필리핀이라는 국명은 16세기 중엽 이 지역으로 파견된 에스파냐 탐험가 빌리아로보스가 당시의 에스파냐 황태자 필립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자연     

필리핀의 국토는 7,0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섬은 이름 없는 암초이거나 산호초이고, 사람이 정착하고 있는 섬은 880개 정도이다. 그 가운데 루손섬[島]과 민다나오섬[島]이 가장 크고, 그 밖의 주요 섬으로는 양대 섬 사이에 있는 비사얀 제도의 7개섬(사마르, 파나이, 레이테, 세부, 보홀, 마스바테, 네그로스) 및 민도로, 팔라완 섬이 있다. 지형은 필리핀의 최고봉인 아포산(2,954m)을 비롯하여 마욘, 탈 등 여러 개의 화산을 가진 산지와 미국의 2배가 넘는 복잡한 해안선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환태평양 화산대와 환태평양 지진대가 지나고 있기 때문에 화산이 많고 지진이 잦다. 또 해안지대에는 곳곳에 산호초가 발달해 있고, 태평양의 필리핀 해구(海溝)에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해연(海淵)의 하나인 케이프존슨과 엠덴 해연이 있다. 북위 4∼21℃의 열대권에 위치하므로 지역, 시기에 따른 기온의 교차가 적고, 전국을 통틀어 연평균기온은 27℃ 정도이다. 기후에 변화를 주는 요인은 주로 강우인데 강우 형태에 따라 4∼7개의 기후형으로 구분된다. 

 

주민     

필리핀인(人)은 기본적으로 말레이 인종에 속하지만, 여러 차례에 걸친 이주의 결과 형성된 것으로 풀이된다. 첫째, 아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있던 빙하기에 동남아시아에서 건너온 아에타족(族:니그로이드에 속함)의 조상(인류학상으로는 프로토 말레이인), 둘째, 대륙에서 분리되고 난 뒤 인도네시아, 중국의 화남(華南), 인도차이나 방면에서 바다를 건너온 산지 미개발 부족의 조상(인류학상 인도네시안 A.B), 끝으로 BC 2~3세기부터 14∼15세기 사이에 인도네시아 방면에서 건너온 문명화한 여러 평지 부족(오늘날 필리핀인의 대부분)의 조상(인류학상 말레이인)으로 형성되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고립된 정착 생활이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현재의 여러 부족 사이에 100여 개의 언어 및 방언이 존재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언어는 타갈로그, 일로코, 팜팡고, 비콜, 세부아노, 일리가이논(일롱고), 와라이와라이(사마르-레이테), 마긴다나오, 팡가시난 등 말라야-폴리네시아어파(語派)의 9자매어(姉妹語)이다. 1946년 독립 이후 타갈로그어(語)를 기초로 한 필리핀어(語)가 국어로 쓰이고 있으며 영어도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에스파냐 문화가 파급되기 이전부터 힌두, 이슬람, 중국 문화가 전래되기는 하였으나 당시에는 변경지대에 불과하였던 이 나라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여러 부족이 할거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통일을 이루게 한 것은 에스파냐와 미국의 식민지 지배였다. 에스파냐 사람들이 들어오기 이전에도 산스크리트나 아랍 문자에서 유래한 자모(字母)를 가지고 있었으며, 14세기 이후에는 민다나오섬에서 루손섬에 이르기까지 이슬람교(敎)가 전파되었다. 16세기에 에스파냐 사람들에게 정복된 이후에는 이슬람 세력이 남부로 쫓겨나기는 하였으나 이슬람교도(모로족)들은 외국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고 독자적인 생활과 문화를 고수하였으며 오늘날에도 국가적 통일을 저해하는 소수민족 문제의 핵심이 되어 있다.   한편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된 뒤에는 중국인들의 유입이 본격화하여 상인, 기술자로서 식민지 경제에 큰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여러 차례에 걸친 추방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지위를 지켜왔다. 더욱이 필리핀 사람들과 활발한 혼혈이 이루어져 필리핀의 유력한 경제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들의 후예이다. 에스파냐 사람들 역시 식민지 지배와 포교 과정에서 원주민 상류층과의 혼혈이 빈번히 이루어졌다. 이 밖에 미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과의 혼혈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메스티소(혼혈아)를 탄생시킴으로써 필리핀 사회에 독특한 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종교적으로도 아시아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그리스도교 국가라는 것은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역사     

세계일주에 나선 마젤란이 세부섬[島]에 도달한 것은 1521년의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에스파냐는 필리핀 정복에 착수하여 1565년부터 시작된 레가스피의 평정활동으로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 당시의 원주민 사회는 ‘다투(datu)’라고 불리는 우두머리와 그 가족, 자유민(평민), 예속민의 3계급으로 구성된 바랑가이(barangay : 부족)를 단위로 상호 고립적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급적 경제를 유지하고 원시적 애니미즘을 믿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며, 통일이 안 된 데다 문화수준이 뒤떨어져 에스파냐의 정복을 한층 수월하게 만들었다.  이후 필리핀의 사회구조는 에스파냐 사람들에 의하여 다시 편성되었다. 로마가톨릭의 전도·개종과 아울러 전 국토에는 교구교회와 행정관청을 가진 소도시를 단위로 한 지배체제가 구축되었다. 종래의 바랑가이 우두머리는 이 조직의 지배 기구에 편입되어 세금을 납부하고 부역을 제공할 책임을 맡음으로써 에스파냐 지배자들과 원주민 사이의 중간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에스파냐의 중상주의적 식민지정책은 필리핀의 장기적인 경제 발전을 어렵게 만들었고, 주민들은 지배자들의 생활을 지탱해 주는 세금이나 부역을 제공하는 일 이외에는 예나 다름없이 자급적 생산만을 계속하였다. 에스파냐의 주된 경제 활동이었던 ‘갤리언(큰 범선) 무역(마닐라와 멕시코의 아카풀코 사이에 행하여졌던 교역)’은 중국을 비롯한 동방의 산물과 신대륙 멕시코의 은화를 중계하는 데 그쳤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무역에는 엄격한 제한이 따랐기 때문에 현지의 경제활동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갤리언 무역이 벽에 부딪침에 따라 19세기 초에는 자유무역 정책이 채택되고 1834년에는 마닐라항(港)이 정식으로 개항되었다. 이와 함께 18세기 말에 시작된 설탕·담배·마닐라삼 등 수출용 상품작물의 재배는 수에즈 운하의 개통(1809)에 힘입어 급격히 발전하였고 자급적 경제는 상품경제로 전환되어 갔다. 그 결과 부유한 지주·상인 계급이 형성되고 그들의 자녀들이 외국에 나가 고등교육과 아울러 자유사상의 세례를 받게 됨에 따라 자신과 민족의 자유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상가가 J.리살이다. 민족적 일체성이 강화되고 민족의식이 형성됨에 따라 에스파냐의 지배가 시작된 뒤부터 산발적, 지방적으로 일어나던 저항운동이 점차 정치성과 전국성을 띠게 되었으며,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독립을 요구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리살이 개혁사상을 담은 저술활동 때문에 사형당한 1896년 A.보니파시오가 조직한 카티푸난은 필리핀의 독립을 위한 무력혁명을 촉진하였고 마침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898년에는 E.아기날도를 수반으로 하여 독립이 선언되었고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공화국 헌법이 기초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국-스페인전쟁에서 마닐라만(灣)의 에스파냐 함대를 격파한 미국이 1898년 맺어진 파리조약에 따라 필리핀을 할양받은 뒤 1902년 필리핀인들의 저항을 물리쳤기 때문에 이 공화국은 단명으로 끝났다. 새로운 지배자인 미국의 지배 방침도 필리핀혁명을 계기로 활성화하기 시작한 내셔널리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1907년에는 자치권이 부여되어 필리핀인들에 의한 입법의회가 구성되고 독립을 겨냥한 내셔널리스트당이 결성되었다. 이어서 1934년에는 필리핀 독립법이 미국의회를 통과하였고, 이듬해에는 M.L.케손을 대통령으로 하는 필리핀 연방정부가 1946년 독립을 목표로 발족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정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게 되어 일단 중단되었고, 1941년 8월에는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1943년 일본 점령군은 J.P.라우렐을 대통령으로 내세워 독립을 선언하게 하였다. 그러나 1945년 미국군이 필리핀을 탈환하고 이듬해 4월 총선거가 실시되어 로하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7월 4일 필리핀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정치     

필리핀의 정치는 독립 후에도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운영되었다. 미국은 필리핀과 특혜적 통상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군사기지협정, 상호방위조약, 군사원조협정을 맺어 필리핀을 공동방위체제 아래 두었다. 필리핀의 정치체제는 미국을 모방한 1935년 헌법을 기초로 삼권분립, 보수양당제 형태를 취하였다. 1950년대 초까지는 부흥이 늦어진 데 따른 경제 위기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항일(抗日) 게릴라 조직이 모태가 된 후크단(후크발라하프)의 반란 때문에 정치 불안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953년 대통령에 당선된 R.막사이사이의 노력과 미국의 강력한 원조로 경제성장이 궤도에 오르고 반란은 평정되었다.  필리핀의 정치사상 카리스마적 인물로서 아시아는 물론 국제협력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던 막사이사이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고, C.P.가르시아와 디오스타도 마카파갈이 그의 뒤를 이었으나 1960년대 이후에는 의회주의를 기초로 한 정치적 안정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공업화의 추진과 대미(對美)자립을 요구하는 내셔널리즘의 팽창과 때를 같이 하여 1965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F.E.마르코스는 대미관계 일변도의 외교정책에서 벗어나 아시아 외교를 축으로 한 외교정책의 다변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공산권 국가와도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한편 농지 개혁과 식량증산·산업재편성·외자도입을 비롯한 투자촉진정책 등의 경제개발 시책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1969년 대통령에 다시 당선된 마르코스는 점차 독재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1972년 9월에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3선(三選)을 금지하는 헌법규정을 폐지함으로써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한 길을 터놓았을 뿐만 아니라 1973년 1월에는 대통령에게 입법권을 집중시키는 새 헌법의 공포를 강행하였다. ‘새로운 사회’라는 슬로건 아래 국민 통제와 동원이 진행되고 군부의 정치적, 경제적 진출이 현저하게 확대되었다. 마르코스의 계엄령 체제는 거의 해마다 국민투표라는 요식화된 신임절차를 밟음으로써 정권연장을 합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그 후 1975년부터는 촌락의 주민집회(바랑가이)를 기초로 한 ‘정상화’ 과정이 시작되어 1976년에는 전국 13개 지방 대표를 뽑아 ‘입법자문의회’를 소집, 실시를 미루어 왔던 잠정 국민의회 규정을 수정하였다. 1978년 4월에는 선거가 실시되어 공선(公選)의원, 직능대표, 임명의원 등 200명으로 구성된, 국회의 대행기관인 잠정 국민의회가 발족하였다. 마르코스는 잠정의회의 구성과 동시에 대통령 겸 총리에 취임함으로써 형식상의 의원내각제 체제를 갖추는 한편, 부인 이멜다를 마닐라 시장, 아들을 대통령 보좌관으로 임명하는 등 족벌 독재체제까지 구축하였다. 마르코스의 독재체제에 투옥 등 탄압을 받으면서 항거하여 온 반정부 세력들은, 1983년 8월 미국에서의 망명생활 끝에 귀국한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마닐라 공항에서 피살되고, 이 사건에 군부가 개입되었다는 의혹이 짙자 더욱 격렬한 반정부 운동을 벌였다.  마르코스는 난국을 모면하기 위한 호도책으로 1986년 2월 7일 앞당겨 대통령선거를 실시, 아키노 의원의 미망인 코라손과 경쟁하였다. 그 결과 필리핀 의회에 의해 마르코스의 당선이 선포되었으나, 대다수 국민은 이를 유례 없는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엔릴레 국방장관 등 군부 수뇌가 코라손 지지를 선언하여 양측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고, 마르코스와 코라손이 각각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군부대가 코라손을 지지하자 마르코스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은 부통령으로 취임한 S.라우렐을 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임명하였다. 1992년 5월에 대통령 선거에서는 라모스 전(前)국방장관이 승리했다. 라모스는 불법이던 공산당을 합법화하여 1969년 이후 계속되어 온 내전종식의 길을 열었다. 라모스 대통령은 경제 재건을 목표로, 2000년까지 필리핀을 신흥공업국 대열에 올려놓자는 ‘필리핀 2000’ 정책을 추진하여 산업화와 경제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998년에는 영화배우 출신의 조셉 에스트라다(Joseph Estrada)가 대통령이 되지만, 부패로 국민들의 반감을 사 2001년 중도사임했다. 에스트라다의 사임으로 디오스다도 마카파갈(Diosdado Macapagal)의 딸인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Gloria Macapagal-Arroyo)가 대통령이 되었다. 2004년 재선에 성공하지만, 부패에 연루되고 만다. 2010년 코라손대통령의 아들인 노이노이 아키노(Noynoy Aquino)가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아로요는 선거조작 혐의로 기소되었다.

 

경제     

필리핀은 전형적인 농업국이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제1차 산업, 특히 농업에 종사하며, 이러한 점에서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비슷하다.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으며 각지에서 계단경작을 하고 있어 필리핀 특유의 경관을 이룬다. 그 밖에도 옥수수와 같은 잡곡과 감자 등의 재배도 활발하며 특산물로서는 마닐라삼이 있다. 임업도 매우 중요한 산업의 하나로 민다나오섬을 중심으로 나왕 목재의 벌채가 성하다. 최근에는 나무의 남벌로 임산자원의 고갈이 문제시되고 있으며, 국내에 합판공장이 대량 건설되어 목재수출의 증가율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동광·철광을 비롯하여 금, 크롬, 망간, 니켈 등이 주요 광물로 꼽힌다. 종래에 빈약하였던 석유는 1970년대부터 활발해진 유전 탐사 결과 1979년부터 채유가 시작되었다.  수산자원도 풍부한 편이지만 미개발 부분이 많다. 1950년대 수입환관리(輸入換管理)와 페소화(貨) 가치의 상승이라는 유리한 조건과 더불어 생산재수입, 금융, 세제면의 우대 조치가 실시되어 공업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이와 함께 국민소득 및 노동력 인구의 구성이 농업으로부터 공업으로 급속한 전환을 보였고, 각종 경공업 분야에서도 자급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1960년을 전후하여 국내시장이 포화상태에 달하고 환수입이 자유화된 데다 페소 가치가 절하됨에 따라 성장 속도가 둔화되었다. 이와 같은 수출형, 처에 의존하는 농업구조와 도시, 농촌 간의 격차, 소득계층에 따른 심한 불균형, 지나치게 비대해진 재벌의 존재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사회     

필리핀에 민족적 통일을 가져다준 것은 에스파냐와 미국의 식민지 지배체제였다. 따라서 토착문화 위에 에스파냐와 미국 문화의 영향이 깊이 뿌리박혀 특이한 복합문화가 성립되었다. 특히 도시인, 그 중에서도 엘리트층의 생활이나 행동양식은 분명히 서구적이다. 에스파냐 사람들이 전파한 로마가톨릭은 필리핀을 아시아에서 유일한 그리스도교 국가로 만들었다. 종파별로는 로마가톨릭 83%에 프로테스탄트와 여러 토착 종파를 합하면 전체 인구의 92%가 그리스도교도이다. 또 연중행사 등과 더불어 플라자(광장)의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도시의 생활관습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짙게 풍긴다.  한편 각 바랑가이(바리오:최소 행정단위)의 수호 성인을 받드는 축제는 농민생활의 중요한 단면 가운데 하나이다. 이슬람교분리주의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의 영향은 경제생활의 변화라든지 의회정치의 정착 등에서뿐만 아니라 영어의 사용이나 교육을 통하여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엘리트층의 사상 형성의 저변에는 미국의 영향이 짙게 깔려 있다. 오늘날 영어 사용 인구는 45%이며 독립 이래 국어가 된 필리핀어에 버금가는 보급 상태를 보이고 있다.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한 이래 교육도 널리 보급되었다.  교육 수준은 높은 편으로, 초등교육 기관 중 최초의 2년 동안을 제외하고는 주로 영어를 사용한다. 초등교육과 중학교 과정은 의무교육제이며, 문맹률은 8.4%(1995) 정도이다. 미국의 대학, 대학원으로 유학하는 엘리트층을 흔히 볼 수 있으며, 미국과 필리핀 간의 교수, 연구원의 교류도 많은 편이다.  필리핀의 사회는 흔히 2계급 사회라 불린다. 이것은 사회 전체가 일부의 부유한 상류층과 농민, 근로자로 구성되는 하류층으로 나누어져 실질적으로 중간계층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빈부의 격차는 좀처럼 해소될 것 같지 않은데, 일부 부유층은 식민지 시대부터 외국인 지배자와 관계를 맺어 거액의 재산을 축적하였다.  

 

당연히 이러한 빈부 격차는 바나나 이야기를 보면 더욱 실감이 난다.

일본은 필린핀의 바나나 주요 수입국이었다.

그런데 한 필리핀 여성이 일본 소비자 단체에 보낸 편지가 일본에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적이 있다. 편지를 보낸 여자는 바나나 농장에서 일하는 농민이었다. 편지 내용은 “당신네 나라에서 먹는 바나나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아느냐. 그 과정에서 필리핀 농민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필리핀에서 생산되던 토종 바나나는 원래 크기가 작았지만 맛이 좋았다.

그런데 미국의 과일 다국적 기업이 필리핀에 진출하면서 굉장히 큰 바나나가 열리는 미국의 개량종을 심었다. 필리핀은 땅 값도 싸고 월급도 싸니까 그곳까지 가서 재배를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남의 나라까지 진출해서 대량 생산으로 전 세계의 물건 가격을 마구 쥐고 흔들면서 조작하는 이런 기업을 다국적 기업이다. 여기서 간단히 다국적기업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다국적기업이란 세계기업(world enterprise)이라고도 한다. 엑슨·셸 등의 석유회사, GM·포드 등의 자동차회사, 그리고 IBM 등이 대표적이다. 다국적기업이라는 용어는 1960년 D.E.릴리엔탈에 의하여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나,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무역국제투자의 이례적 급증이 다국적기업의 신장(伸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실 때문이었다. 

다국적기업은 국제 직접투자의 한 특수한 형태로서 단순히 해외에 지점 또는 자회사(子會社)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지국적을 취득한 현지법인으로서의 제조공장 또는 판매회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지의 실정과 모회사(母會社)의 전략에 따라 움직이고, 공통적인 풀(pool)에서 자본·인적 자원 및 기술 자원을 공급하는 국제적인 조직망을 가지는 기업조직 또는 그 기업조직의 일환이다. 다국적기업이라는 형태로 미국의 대기업이 해외진출 특히 유럽 여러 나라로 진출하게 되자, 선진 제국 사이에 치열한 시장 쟁탈전을 벌이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자본의 국제적인 집중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독과점(獨寡占)의 강화로 한 나라의 국민경제기간산업이 외국자본의 지배하에 들어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생기게 되었다. 이미 1960년대 프랑스의 대통령 드골은 미국자본의 유럽 진출에 반대하고, ‘미국재외생산’에 얽힌 몇 가지 문제를 꼬집어 반미 기운을 일으킨 적도 있다. 또한 J.J.C.슈레베르는 그의 베스트셀러 《미국의 도전》(1967)의 머리말에서, “이제부터 15년 이내에 유럽에 진출한 미국기업이 유럽을 앞질러 미국·소련에 다음가는 세계 제3의 경제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EC가 9년째를 맞게 되는 현재, 이미 유럽 시장의 조직의 근본은 미국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고 충격적으로 문제를 거론하였다. 어쨌든 실제로 유럽 제국의 중핵(中核) 산업부문에서 외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점차 높아졌으며, 미국계 다국적기업에 매수당하는 기업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다국적기업의 발전을 가리켜 미국자본에 의한 세계경제 지배의 진행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러한 견해는 일면적으로는 타당하지만, 사태를 전체적으로 파악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서구 제국이나 일본의 대기업이 미국보다는 뒤지기는 하였지만 똑같이 다국적 기업의 길을 걷기 시작한 사실을 올바르게 평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과일 다국적 기업으로는 우리가 잘 아는 미국의 델몬트, 1963년에 필리핀에 진출한 돌, 선키스트, 일본의 스미토모 등이 있다. 참고로 이 농장에 고용된 필리핀 농민들은 도시락을 두 개씩 싸들고 다니면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그런데 미국 바나나가 필리핀의 기후와 풍토에 잘 맞을리가 없다. 당연히 벌레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중에서 농약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중에서는 벌레가 생긴 곳을 잘 알 수 없으니까 농민들에게서 밑에서 깃발을 흔들어 표시하게 했다.

 

그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면서 농약을 뿌린 것이다. 사람에게 농약을 뿌려 대니까 농민들이 농약에 중독돼서 쓰러지고 죽어 가기 시작했다.

농약에 저항력이 강한 사람의 혈액형이 O형이라는 것을 밝혀 내고는 O형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을 골라서 깃발을 흔들게 하고 다시 농약을 뿌려 댄 것이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경제 강국이 약소국에서 하는 일들을 보면 이렇게 소름끼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사실이 일본에 알려지자 여성 단체, 소비자 단체에서 불매 운동을 벌인 것은 단순히 그 여성 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동정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바나나에 뿌려지는 농약이 얼마나 독한가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1980년대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 갑자기 바나나가 팔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이다.

일본에서 바나나 소비가 갑자기 줄어드니까 그것을 다 우리 나라에서 수입했기 때문이었다.

 

바나나는 사과나 배보다 훨씬 부패가 빠르게 진행된단다. 그리고 완전히 익은 것을 따면 운반 도중에 상하게 된다. 그래서 파란 바나나를 따서 성장을 억제시키는 농약을 푼 물에 담근 후 선풍기에 말려서 포장하고 수출하게 된단다. 이때 바나나에 뿌리는 농약이 ‘데믹’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기형아 출산의 원인이 된다고 해서 악명 높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바나나가 우리 나라에 도착하면 빨리 익으라고 ‘카바이트’로 익힌다. 그런 것도 모르고 우리 국민들은 몸이 약한 환자나 어린이에게 바나나가 영양식이나 되는 듯이 사다 먹여 왔다. 그리고 바나나가 대량 수입되어 가격이 싸지니까 우리 농민들이 생산한 과일은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다. 바나나 수입은 이렇게 우리 건강을 좀먹는 일인 동시에 우리 농민들의 삶의 터전도 빼앗게 되었다. 추억의 제주도 바나나는 그렇게 추억의 상품이 되었다.

 

살펴보면 여러모로 너무나 흥미로운 점이 많다. 이곳은 식민지 아시아의 강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표본적인 곳이 아닌가 한다. 이후로 앞에 집고 나갔던 다국적기업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면서 더욱 흥미로운 토론점들을 찾았으면 한다.

 

2012 4월 26일

 

출처

필리핀의 과두제 민주주의- 정치적 독점의 해체 없는 민주화: 박승우

최열 우리 환경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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