ÜBER DAS GEMEINSAME, UNIVERSALITÄT UND KOMMUNISMUS
공통적인 것, 보편성 그리고 공산주의
- 2011년 1월. 에티엔 발리바르와 안토니오 네그리 사이의 대화
2014년 7월 26일, 한상원
좌파 철학과 사회분석의 다양한 전통들 속에서 최근 코뮌주의(commune-ism)라는 의미에서의 공산주의(Kommunismus)의 개념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물음은 발리바르와 네그리 사이의 이 대화 역시 조건짓고 있다. 본질주의적인, 그리고 사회변화의 역사적인 필연성을 요청하는 개념들을 넘어서 공산주의는 어떻게 사유될 수 있는가? 후기 오페라이스모와 알튀세르의 전통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스피노자의 존재론 그리고 헤겔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동일한 이름들과 관계를 맺어왔다. 그럼에도 양자는 코뮌주의라는 표상의 관점에서 구분된다.
에티엔 발리바르
현재의 위기는 단지 특정한 경제적 메커니즘의 위기일뿐 아니라 우리의 세계질서를 포함한 문명의 위기이기도 하다. 이 위기는 우리가 최근의 국면에서 다루었던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범주들을 새로이 생각하도록 강제한다. 이는 이와 유사한 역사적인 정세 특히 맑스주의의 역사에서도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기획으로 여겨져 왔다. 알튀세르가 말했듯이 그것은 이미 주어진 범주들을 대입하고 활용하여 정세 자체를 사고하는 것을 의미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세 속에서, 정세를 강요하는 조건들 하에서 사고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특히 위기의 전략적인 차원들이 규정되어야 한다. 그것이 공통적인 것의 존재론과 지구적 혁명 주체로서 다중의 정치 철학에서 근거하는 것이든, 배제하지 않는 시민성, 그리고 내가 평등-자유(Gleichfreiheit, Égaliberté)라는 범주와 연결시키고자 하는 "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특수한 개념에서 기인하는 것이든, 우리가 대안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현재의 후기자본주의적 순간에 대안에 대해 사유하려는 우리의 시도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기여들일뿐 아니라 결정적인 요소들이기도 한 두 가지 의미 있는 이념들이 존재한다. 첫째 이념은 "구성권력(konstituierende Macht)"에 관한 것이다. 내가 평등자유라고 부른 것과 토니(네그리)가 구성권력이라고 부르려고 시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수렴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공유하는 역사적인 유산, 즉 혁명적 전통으로 소급될 수 있다. 이는 당연히 투쟁만이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제도들의 변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념과 관련을 맺는다. 중요한 것은 반란적인 또는 구성적인 것이 구성된 것에 대해 우위를 갖는다는 것만이 아니다. 투쟁의 물질성은 언제나 특정한, 이미 형성된 공식 담론, 즉 국가와 지배 계급의 담론, 헤게모니적 담론이 이 투쟁의 실존을 부정하고 우리로 하여금 이에 대해 믿게 만들도록 시도하는 바로 그 곳에서 등장한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구성권력, 봉기들이 역사의 추동적 힘으로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역사, 문화, 사회에서 이러한 공간들의 척도와 한계는 매우 흥미롭다. 적어도 첫 눈에 보기에 나는 다중 개념으로 이를 요약하는 데에서 어떠한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다만 오로지 다중이 실존하는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반란의 요소들의 가능한 수렴이라는 규제적 이념으로 여겨지는 경우에만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토니의 논의에서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두 번째 요소는 노동과 생산력에 대한 고찰들이다. 우리의 가장 큰 차이는 내가 이미 오래 전에 정치와 역사적 변화의 인류학적 토대로서 생산력의 절대적인 우위 또는 고유성에 대한 토니의 존재론적 규정으로부터 결별했다는 데에 있다. 생산력 분석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러나 우리가 사회적 투쟁을 이해할 때 반드시 다뤄야 할 문화와 사회의 차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토니는 맑스에게서는 주변적으로만 언급될 뿐인 물질 노동과 정신노동의 변증법의 의미 [1] 를 언급함으로써, 특히 그가 노동에는 지적 노동과 수공업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 차원 역시 존재하며 이 때문에 공통적인 것을 창조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하는 모든 형태의 사회적인 고통들과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맑스가 확신했던 노동에 대한 공리주의적 관점을 혁명화하였다.
내가 보기에 토니는 이러한 모든 문제들에 대해 존재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생산적 동물이라는 인간 규정에 대해서 존재론적 차원 또는 일면성을 계속 밀어붙이기 때문에, 그는 공산주의가 노동의 점진적 사회화의 목적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손쉬운 서사를 형이상학적 극단에 이르기까지 발전시킨다. 여기에는 오래된 알튀세르적인 입장, 즉 정치를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빠져 있다. 모든 것이 존재론적 기본구조를 통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정치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토니의 논의에는) 정치의 불확실성이 빠져 있다. 현재 정치의 경제적인 현상들 또는 이데올로기적 차원들 속에서 그 근원을 갖는 정치적 갈등 또는 위기의 놀라움들도 빠져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순간에 각각의 전환들에 부과되는, 그리고 노동의 미래적 차원으로서 공통적인 것의 중단없는 상승과 "자본의 공산주의" 사이의 단순한 양자택일로 이 역사적 순간 전체가 축소되지 않도록 만드는 종교,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적 담론과 실천 등은 (그의 논의에서) 어디에 있는가? [2] 이는 놀라운 모순적인 공식이지만 현재의 정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토니 네그리
노동에 대한 언급은 정치적 차원을 축소하기보다는 강화한다. 노동이 생명정치적인 한에서 자유와 평등은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인갂적인 생산적 활동의 내부에서 등장한다. 정치적인 것은 단순히 사회적 협업의 상부구조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시장가치와는 구분되는 가치를 통해 새로이 상부구조를 넘어서며 그 질서와 척도를 초월한다.
정치에 관한 물음을 확장하기 위해 나는 구체적으로 주권과 통치성의 위기로 돌아오겠다. 이 위기에서 "구성권력"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는 우리가 (자유주의적이든 사회주의적이든) 자본주의적 문화의 문제들과 지구적인 조직화의 문제들을 마이클 하트와 내가 제안한 것들과 대면시킬 것을 요구한다. 이제까지 말한 것들이 자본주의적인 이윤의 지배와 자본주의적인 통제에 저항하는 새로운 사용가치로서 공통적인 것의 개념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갖는다면 우리는 현재적인 정치적 위기를 엄밀한 의미의 정치적인 위기로, 즉 통치성과 주권의, 현대 정치 그 자체의 위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통치성이 급격하게 변화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통치성은 통일적이고 조직된 결정의 질서(Anordnung)에서 출발하기보다는 상이한 주체들 사이에서 달성된 결정들, 계약들, 관습들의 역동적인, 다원적인 그리고 표현되지 않는 체계(System)에서 출발한다. 관리(governance)는 점점 더 통치(government)를 대체한다. 통치가 주권의 법적인 특성들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관리와 행정이 입헌적인 그리고/또는 행정적인 법(권리)으로부터 멀어진다. [3] 더 분명하게 표현하자면, 도처에 법적이고 행정적인 질서에 반하거나 이러한 질서와 상호작용하는 잉여 [4] 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형태변화가 발생한다. 통치는 이러한 상호작용에 종속된다. 누군가는 커다란 다수를 얻어 상대방을 제치고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지만, 동일한 방식으로 관리의 대안들에 종속되어 버릴 수 있다. 그 사례들은 매우 많으며, 이는 (오바마가 보여주듯) 통치와 법질서에 관한 오늘날의 경험들을 포함한다. 이 잉여, 이 대안적인 질서가 주권과 자본주의적 통치의 새로운 구조들 내에서 종속의 새로운 형태들로 소급될 수 있는가? 또는 이러한 잉여와 질서는 구성권력을 위한 공간을 형성할 수 있는 모순적인 토대들일 수 있는가?
우선 우리는 자본주의적 통제가 새로운 발전과 위기의 조건 하에서 자신의 내적인 균형을 다시금 수립하는데 성공할 것인가, 그리고 공통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표상 그리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새로운 형태들을 찾는 주체들이 공통적인 것에 대한 자본의 통치 구조에 저항하는데 적합한 제도들을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제국의 수준에서 주권적 실천들의 약화와 더불어 개시되는 다른 공간들과 마찬가지로 관리를 파악하는 일종의 제도적 이분법이 분명히 인식 가능하다. 아마도 우리는 이 이분법을 천예하게 파악하고 잉여를 이러한 위기 관계의 측면에서, 즉 공통적인 것의 요구들이라는 관점에서 축적해야 할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나는 "공통적인 것"이라는 범주의 사용방식에 대한 인식론적인 고찰로부터 시작하겠다. 우선 – 그리고 이 점에서는 토니와 내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본다 – 우리는 "공통적인 것"이 내가 "애매함(Äquivokation)" 또는 애매한 의미라고 부른 것을 포괄하는 범주라는 점, 즉 그 의미와 용법이 여러가지라는 사실뿐 아니라 대립하는 의미들 사이에 지속적인 긴장이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고찰에서 나는 적어도 세 가지의, 내가 보기에 상호 환원불가능한 방향들을 본다. 그 중 하나는 "보편성" 또는 "보편적인 것"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나는 과거에 보편적인 것의 개념이 자기 내 분열되어 있고 갈등을 내포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특히 서구에서 보편적인 것의 개념은 철학적인 전통과 정치적인 전통 사이에서 다양하게 쪼개져 있다. 그것은 한 편에서 개인적 인격의 보편화될 수 있는 권리들에 관한 이념을 중심으로, 하나의 확실한 시장의 동질성 또는 시장을 지배하는 등가물들의 확고한 체계와 결합되어 있다.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은 보편적인 것을 세밀화되고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요구와 시도와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특정한 차이들과 특성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 인종, 문화, 건강/질병의 대립, 정상성과 비정상정의 전체 문제 등 특이성(Singularität)들의 보편자의 문제다. 나는 여기서 공통적인 것에 관한 모든 고찰들이 직면하는 본질적인 차원을 본다. 이러한 고찰은 거칠게 말해, 보편적인 것 그 자체를 차이의 개념들 속에서 새로이 사유하고자 시도해야 한다.
본질적으로 규제적인 이념으로 남거나 하나의 영구적인 난관으로 남아 있는 보편적인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직접적으로 하나의 국가 또는 공적 제도들의 체계의 형성이라는 기획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니면 그것은 민족적, 종교적, 또 혁명적인 것 등 상이한 형태들을 취할 수 있는 사회적인 관계들의 공동체적 차원을 촉진하는 문제와 직면해 있다. 이 두 문제들은 공적인 것, 시민과 관련된 것이다. 인간이 공동체의 외부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공동체들이 상호 양립 불가능하다는 점, 이러한 차원들 중 하나가 다른 것으로 소급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공산주의는 세 번째,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방향이다. 나는 공통적인 것에 관한 고찰이 이에 직면한다고 보고 있다. 공산주의는 그것이 네그리가 언급한 윤리의 수준에서든, 아니면 더 깊숙히 논리의 수준에서든 내가 부정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개념 또는 특징이다. 공산주의에 관한 문제는 그것이 20세기의 역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평가절하되고 경멸될 뿐 아니라 깊숙히 좌절하고 내적으로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공산주의 담론은 착취와 상이한 형태의 억압 – 특히 자본주의 – 에 대한 대안의 개념 속에서뿐 아니라, 그것이 역사적으로 실현되었듯이, 대안에 대한 대안이라는 개념 속에서 정식화되어야 한다. 어째서 맑스의 개념들에 의거해 세워진 공산주의 기획이 그 적대적 대립물 속에서 종결되었는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공산주의에 대한 논의는 아무 것도 낳지 못하거나 심지어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레닌과 스탈린이 나쁜 녀석들이라거나 마오가 대중은 속인 교활한 지배자라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어째서 대중들, 다중들이 공산주의를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심지어 그들이 해방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몰락을 향한 길로 드러난 것에 대해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입장에서 공산주의를 새로 사유하려고 시도한다. 토니는 자신의 방식으로, 기독교적 전통으로의 (정확히 말해 프란치스코 수도회적인, 혁사 속에서 하나의 위대한 "공산주의", 가난, 사랑, 그리고 형제애의 공산주의로의) 회귀 속에서 공산주의를 사유한다. 나는 급진적 부르주아적 또는 시민적인 형태의 전 맑스주의적 공산주의로, 즉 "평등자유"의 공산주의로 회귀함으로써 공산주의를 재사유한다. 이는 물론 시장의 공산주의는 아니다. 이는 수평파, 블랑키와 바뵈프의 공산주의, 맑스적인 사회주의와의 결합에 앞서는 공산주의의 정치적 이념이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 세계에서 공통적인 것 개념의 애매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결하고자 희망할 때 우리 모두가 행하는 것이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고찰이 주의해야 하는 세 가지 심급들은 따라서 다음과 같다.
1. 생성 속에서 보편성의 문제
2. 국가를 넘어선, 그러나 시민성과 법을 필연적으로 넘어서지는 않는 공적 영역의 문제
3. 공동체들과 그 상호적인 합일 불가능성이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
토니 네그리
나의 결론은 현재적 경제위기가 자본주의적 지배의 극복이 우리가 희망해왔던 것보다 훨씬 쉬울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관리의 균형이 깨어지거나 전복되며 "다중의 공통적인 것"이 "자본의 공산주의"에 대한 우위를 획득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상황은 비극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위기에 대한 민주적인 해결일 것이다. 우리는 정치학이 상세하게 자본주의적 통치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수용하자. 이제 나는 에티엔의 세 번째 주제로부터 공통적인 것의 새로운 제도들에 대한 문제에 관한 논의를 발전시키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맑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법철학에서 헤겔은 객관적인, 시민적인 그리고 공적인 정신의 제도들을 가족, 시민사회, 국가라는 세 가지 커다란 장들 속에서 발전시켰다. 공통적인 것의 입장에서 가족, 그리고 경제적 상황의 관점에서 교육, 재생산, 그리고 상속(하나의 괴물이 아닌가!)의 영역에서 정체성의 수단으로서 가족의 파괴에 관한 비판적 논의가 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가족
의 파괴)은 결혼과 부모 자식 관계에 대한 더 적합하고 행복한 형태들일지도 모른다. 시장과 기업들 대신에 나는 사회적 생산과 그 민주적 조직에 대해 논의하자고 제안한다. 직업동맹, 노동조합 그리고 "주요계급들" 대신에 나는 의사소통 네트워크들과 복지의 탈구조화에 대해 말한다. 소유자 개인주의, 은행 그리고 금융공산주의 개인에 인간을 통한 인간 형성의 새로운 형태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더 이상 공적이지도, 사적이지도 않은 공통적인 법의 새로운 형태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제안들에 도달하고 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때까지 추진되어야 한다. 나에게는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논의되고 발전되어야 할 커다란 과제로 보인다.
[1] 비물질노동의 우위(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전통적인 제조업 등 가시적이고 고정된 형태의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 서비스업 등 비가시적이고 유연한 형태의 노동의 중요성이 증가한다는 명제)를 의미하는 것 같다.
[2] 논의되지 않는다는 의미. 참고로 “자본의 공산주의”란 자본이 자신의 이윤 축적을 위해 사회 전체의 „공통적인 것‟을 사회적 생산력으로 창조하여 이로부터 잉여가치를 축적한다는 개념이다. 즉 구글이 구글을 사용하는 이용자들이 남기는 정보들을 자신의 것으로 활용해 "연관검색어, 자동완성기능" 등으로 활용해 자신의 이윤을 증대한다든지, 페이스북이 사용자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알고리즘으로 만들어 가상의 네트워크 속에 저장해둠으로써 이로부터 광고 수입을 올린다든지 하는 것들은 모두 인터넷 시대의 "일반 지성"이 자본주의에 의해 어떻게 자본의 생산력으로 전유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네그리는 그러나 이러한 자본의 공산주의는 동시에 공통적인 것에 기반한 (진정한) 공산주의로의 역사적 이행을 가능케 만드는 필요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공통적인 것의 창출이 자본의 이름으로, 자본의 이윤을 위해 이뤄져왔다면, 공산주의는 이제 자본이 만들어낸 공통적인 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 전체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집단적인 통제 하에 둠으로써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네그리의 생각이다.
[3] 입법, 행정, 사법이라는 법적 체계에 근거한 근대적 국민국가가 소멸하고 전 세계가 전 지구적 자본의 네트워크에 의해 관리되는 체계로 변모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4] 이 잉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 문서에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네그리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인 것 같다.